붓다의 길[2]


붓다의 길 [The Buddha's Way]

- 틱낫한 스님(플럼빌리지 수련회 법회)






바른 견해라는 것은 지혜, Prajna, 깊은 이해입니다. 

그것은 수행과 명상의 열매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과 
집중을 수행한다면 통찰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통찰, 그 깊은 이해, 그 지식, 그 지혜가 바로 정견(正見)입니다. 
우리는 정견(正見)이 모든 견해가 사라진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반야심경이 필요합니다. 반야심경은 우리에게 
정견(正見)이라는 것에 대한 바른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합니다.

플럼빌리지에서는 바른 생각이란 
자비, 이해와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만일 당신이 일으킨 생각에 자비와 이해가 없다면 그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이해, 바른 견해(正見)는 다른 모든 행위의 기초가 됩니다.

당신이 생각을 하든, 말을 하든, 행위를 하든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이 바른 것이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바른 견해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가 기초이며 전 세계적인 도덕 체계를 위해서 
불교 전통의 정수인 정견(正見), 바른 이해를 제시해야 합니다.

반야심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태어남도 죽음도 없고, 생성도 파괴도 없고, 증가도 감소도 없다.’ 
그리고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다.’로 계속 이어집니다. 
고통도 행복도 없고, 이로움도 해로움도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공부하면 선/악은 우리 마음의 반영이며 
객관적인 실체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잘 알려진 존재/비존재의 쌍과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존재와 비존재를 초월합니다. 
존재와 비존재는 우리 마음 속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의식은 내면에 있고 세상과 현실은 
바깥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공성에 대한 가르침, 연기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진정 바른 이해, 정견(正見)에 도달하기 위해 그와 같은 가르침을 접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견(正見)을 갖게 되면 모든 것이 진정으로 바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곧 지구입니다.
우리 자신을 잘 보살피는 것은 지구를 보살피는 것입니다.

수행자로서 우리가 세상과 부처님께 바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통찰입니다.

통찰은 우리를 해탈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그 통찰은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과 집중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념(완전한 자각, 분명한 알아차림)과 
깊은 집중 속에서 사는 것은 
지속적으로 통찰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해탈, 
우리 자신의 치유, 우리 자신의 자양을 위한 것이며 
세상의 해탈, 세상의 치유, 세상의 자양을 위한 것입니다.





바른 이해란 정견(正見), 
Samyag-drsti는 모든 견해를 초월합니다. 

모든 견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도구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무상(無常), 무아(無我), 연기(緣起)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견해, 정견(正見)이란 
무상, 무아, 연기를 포함한 모든 견해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야심경의 핵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이 손가락과 같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의도는 당신의 손가락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달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을 달이라고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길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손가락을 아주 지혜롭게 써야 합니다. 

불법을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방편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우리는 통찰과 견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르침은 견해로서 제시된 것입니다.

(성냥에 불을 붙이며) 
이것은 당신에게 성냥을 주려고 있는 것이 아니고 
불꽃을 주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 성냥개비를 적절히 잘 써서 성냥이 불꽃을 일으키게 해야 합니다. 
불꽃이 나타나면 이 성냥개비는 끝에 달린 성냥을 태웁니다. 

통찰이 일어나면 그것은 견해를 소멸하고 더 이상 어떤 견해도 남지 않습니다. 
이제 당신은 자유롭습니다. 거기에는 통찰만 있고 견해는 사라졌습니다. 
당신을 해탈하게 하는 것은 통찰이지 견해가 아닙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생각은 세상에 영향을 미칩니다. 
생각을 잘못 하면 세상이 파괴되고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도 고통을 겪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생각(正思惟)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바른 생각을 일으키면 그 생각에는 분별이 없습니다. 

분별하지 않고, 연기, 이해, 용서, 자비와 궤를 같이하는 생각은 
당신 자신, 당신의 건강, 당신의 마음, 그리고 세상에 즉각 영향을 미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바른 생각을 하는 것은 당신의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바른 생각은 당신을 치유하고 세상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좋은 수행자는 매 순간 바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바른 견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바른 생각을 하는 것은 매우 쉽고 자연스럽습니다.

바른 견해에는 분별이 없습니다. 
바른 견해는 불이와 연기, 분별하지 않음의 통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른 생각의 예술을 배워야 합니다. 

말도 역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비, 이해, 분별하지 않음, 
포용과 궤를 같이하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몸과 마음에 경이로운 것입니다. 
그와 같은 바른 말에는 치유의 효과가 있습니다. 
친절, 용서, 자비가 깃든 말을 하고 나면 훨씬 기분이 좋아집니다. 

바른 말은 당신을 치유할 수 있고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치유하고 당신을 자유롭게 하고 다른 사람과 세상의 치유를 돕습니다. 
그것이 두 번째 종류의 행위입니다.

세 번째 종류의 행위는 몸으로 하는 행위입니다. 
당신이 구하고, 뒷받침하고, 보호하고, 편안하게 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면 
당신 마음은 아주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효과를 즉각 맛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 가지 종류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신(身), 구(口), 의(意)로 짓는 행위이며 
그와 같은 행위를 업(業) 즉, 카르마(karma)라고 합니다.

업의 원인이 있으면 업의 열매, 즉 업의 과보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를 할 때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위의 업을 짓습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에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생각의 영향, 말의 영향, 행위의 영향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살아 있든 사라졌든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의 행위는 계속 남아 있을 것입니다. 

업은 계속됩니다. 
에너지로서의 업, 원인과 결과로서의 업은 계속됩니다. 

당신이 어떤 생각을 일으킬 때 
당신이 일으킨 그 생각에는 당신의 서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 생각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이지요. 
당신은 그 생각에 책임이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자비, 용서, 분별하지 않음의 생각이라면 당신은 아름답게 계속될 것입니다.

바른 생각은 두려움이나 분별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연기의 통찰, 무아의 통찰, 불이의 통찰이 있으면 
생각과 말과 행위가 바를 수 있습니다. 
모든 생각, 모든 말, 모든 행위에는 
우리의 서명이 남아 있고 우리의 업과 함께 계속될 것입니다.






(한글 번역 자료 출처 : BTN(권선아 번역) 바로가기▷)

(참고 : 틱낫한 스님의 Mindfulness를 마음 챙김으로 번역한 것을 전념(...)으로 수정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