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쓰레기 (2)


꽃과 쓰레기 (2)

[틱낫한 지음 | 한창호•주영아 옮김 | 이솔 출판]



윤회를 열반으로 변환시키려면
윤회와 열반이 모두 우리 의식이 드러난 것임을
깊이 통찰하고 명확히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두려움 없음]

번뇌가 바로 깨달음임을 인식할 때
우리는 두려움 없는 미소를 지은 채
망상의 바다 위에서 연민의 배를 타고
평화롭게 태어남과 죽음의 파도를 탈 수 있다.


보살은 우리들과 똑같이 태어남과 죽음,
영속성, 자아의 세계에 머문다. 하지만
보살은 무상과 무아를 깊이 통찰하는 수행 덕분에
존재와 비존재, 하나와 여럿, 오고 감, 태어남과 죽음 같은
관념과 연관된 두려움에서 벗어나 궁극적 차원과 접하고 있다.
이러한 자유 속에서 보살은 평화롭게 태어남과 죽음의 파도를 탄다.

수행을 해서 실체의 궁극적 차원과 접한다면
우리도 보살의 두려움 없는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우리도 보살들과 마찬가지로 번뇌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다른 어딘가로 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번뇌와 깨달음이 하나임을 안다.
마음이 망상에 사로잡혀 있으면 번뇌만을 본다.
그러나 마음이 참되면 번뇌는 더 이상 우리 마음속에 없다.
오직 깨달음만이 있을 뿐이다.
상호 의존하는 존재의 본성을 접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태어남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체의 궁극적 차원과 접하는 법을 안다면,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실체를 안다면,
우리는 모든 두려움을 초월할 수 있다.
                            
두려움 없음은 불교에서 가장 위대한 수행이다.

정원사는 꽃을 쫓아다니지도 않으며
쓰레기로부터 도망치려고 하지도 않는다.
정원사는 꽃과 쓰레기를 둘 다 받아들이고 둘 다 잘 돌본다.
정원사는 어느 한쪽에 집착하지도 않고
어느 한쪽을 배척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둘의 본성이 상호 의존해 존재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정원사는 꽃과 쓰레기 둘 다와 평화로운 관계를 맺는다.
보살은 능숙한 정원사가 꽃과 쓰레기를 다루는 것처럼
아무 분별없이 깨달음과 번뇌를 다룬다.
정원사는 변화시키는 법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부처의 마음가짐이다.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음]

태어나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다.
붙잡을 것도 없고 놓을 것도 없다.
윤회가 곧 열반이다.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속적 차원은 궁극적 차원과 분리되지 않는다.
파도는 물이 되는 상태를 얻을 필요가 없다.
파도가 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속적 차원, 즉 존재와 비존재,
연속과 중단, 오고 감의 세계에 살지만
그와 동시에 열반과도 접하고 있다.

열반은 우리의 본성이다.
파도가 언제나 물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항상 열반 속에 있었다.

무상과 무아에 관한 관념을 포함해
모든 관념이 소멸되는 것이 열반이다.

우리가 무상과 접하면 열반과도 접한다.

모든 것이 이미 존재한다.

태어남과 죽음도 없으며 오직 연속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열반이 아닌 적이 없었다.

안과 밖이라는 관념을 초월하면
우리가 얻고자 하는 대상이 이미 우리 내면에 있음을 알게 된다.
얻고자 하는 것을 공간이나 시간 속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 이미 얻을 수 있다.
얻을 것이 없음에 대한 명상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대상은 이미 얻어졌다.
우리는 어떤 것도 얻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이다.



개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개념을 단지 폭넓은 이해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궁극적 차원에 도달하면 개념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

상호 의존적 관점에서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되면
실재의 참다운 본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궁극적 실재로 가는 문을 열어 주는 열쇠는
상호 의존의 시각으로 깊이 통찰하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

의식에는 언제나
주체와 객체가 있다.
나와 남, 안과 밖은 모두
개념적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주체와 객체는 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동시에 함께 작용한다.
대상 없이는 의식이 존재할 수 없다.
의식은 언제나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주체 없이 객체가 없고 객체 없이 주체가 없다.
주체와 객체 둘 다 상호 의존해 존재하며 둘 다 전체에 토대를 이룬다.

우리 눈이 형상 및 색깔과 접촉할 때 한 순간의 안식이 발생한다.
보는 작용과 안식은 아뢰야식 속 씨앗들에서 생겨난다.

보기, 듣기, 생각하기, 인식하기, 이해하기,
상상하기가 모두 의식이며 의식은 늘 주체와 객체를 모두 포함한다.

'오직 드러남뿐'의 가르침에서 '의식'은
인지하고 인식하고 분별하는 능력을 뜻한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의식에는 여러 다른 기능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의식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의식의 여러 기능이 존재하는 만큼이나 많은 의식이 존재한다.



[온갖 종류의 씨앗]

우리 내면에는 무한히 다양한 씨앗이 존재한다.
윤회, 열반, 망상, 깨달음의 씨앗,
괴로움과 행복의 씨앗,
인식, 이름, 말의 씨앗 등이 존재한다.

열반은 안정과 자유를 뜻하며
괴로움의 순환이 중단되는 것을 뜻한다.
깨달음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아무리 부처님이라고 해도 우리에게 깨달음을 줄 수는 없다.
깨달음의 씨앗은 우리 의식 내부에 이미 있다.
그것이 우리의 불성이다.
불성은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깨달은 마음이라는 내재적 특성으로,
우리는 단지 그것을 보살펴 줄 필요가 있을 뿐이다.

윤회를 열반으로 변화시키려면
윤회와 열반이 모두 우리 의식이 드러난 것임을
깊이 통찰하고 명확히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몸, 우리의 마음, 그리고 세계는
모두 우리 의식 안에 저장된 씨앗이 눈앞의 현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모든 현상은 우리 의식의 드러남이다.
                            
의식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함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온갖 경험과 인식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훈습된다.
우리의 경험과 지각은 아뢰야식에 씨앗으로 저장된다.



[개별적인 씨앗과 집단적인 씨앗]

우리의 모든 씨앗은
가족, 친구, 사회, 혹은 교육
그 어떤 것을 통해 전해졌더라도
본질적으로 개별적인 동시에 집단적이다.


아뢰야식은 개별적 의식과 집단적 의식을 모두 포함한다.

우리의 아뢰야식에 있는 각각의 씨앗은 개별적인 동시에 집단적이다.

우리는 개별적이라든가 집단적이라는 관념을 초월할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은 그 안에 두 가지 요소를 다 갖고 있으며
집단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이 서로 의존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것은 언제나 집단적인 것에 영향을 미치며
집단적인 것도 언제나 개별적인 것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아뢰야식에 들어 있는 모든 씨앗은
개별적 성격과 집단적 성격을 둘 다 지녔다.

우리 의식 속 씨앗에는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에 걸친
많은 이들의 경험과 생각과 인식이 들어 있다.
우리 의식에는 모든 시간과 공간에 걸친 집단적 의식이 스며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