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쓰레기 (1)


꽃과 쓰레기 (1)

[틱낫한 지음 | 한창호•주영아 옮김 | 이솔 출판]



참된 마음의 눈으로 볼 때
연기는 놀라운 화엄의 세계를 가져온다.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가볍고 기쁘고 즐겁다.



[크고 원만한 거울 같은 지혜]

어리석음이 극복되면 이해가 드러나고
아뢰야식은 더이상 번뇌에 지배되지 않는다.
아뢰야식은 크고 원만한 거울 같은 지혜가 되어
모든 방향에서 우주를 그대로 비춘다.
그런 아뢰야식의 이름은 청정식이다.

상호 의존해 존재하는 본성을
깊이 통찰하는 수행을 통해 어리석음 혹은

무지가 프라즈냐, 즉 이해나 지혜로 변환될 수 있다.


수행을 계속함에 따라 무지는 줄어들고 이해는 늘어간다.
어느 순간 무지가 완전히 변환되어
이해가 현실이 되는 지점이 있다.
프라즈냐, 즉 지혜는 때로 청정한 의식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뢰야식은 완전히 정화되면 더이상
두려움, 분노, 증오, 분별심 같은 번뇌에 압도되지 않는다.
변환이 되면 아뢰야식은 자유롭다.
아뢰야식은 크고 원만한 거울 같은 지혜로 변환되어
아무런 왜곡 없이 여여한 세상을 비출 수 있다.

아뢰야식 속에 명상의 대상을 하나의 씨앗처럼 심어 놓고
거기에 매일 물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걷거나 서거나 눕거나 앉는 일상생활을 할 때
알아차림 수행을 통해 그 씨앗에 물을 준다.
매일같이 그 씨앗에 물을 주면
어느 날 우리가 전혀
기대도 하지 않고 있을 때
아뢰야식이 주는 선물로서 이해의 꽃이 나타날 것이다.

제6 의식으로부터 무엇인가를 하도록 명령을 받으면
아뢰야식은 밤이고 낮이고 일한다.

우리는 아뢰야식을 신뢰해야 한다.
아뢰야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면 수행에 성공할 것이다.



[태어남과 죽음]

태어남과 죽음은 모두 조건에 의존한다.
의식은 그 본성상 분별적인 드러남이다.
인식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은 주체와 객체로서
서로에게 의존한다.

태어남과 죽음의 원인과 조건을
깊이 통찰해서 알게 되면
태어남과 죽음이 단지
관념일 뿐임을 깨닫게 된다.

태어남과 죽음은 매 순간 동시에 일어난다.

의식이 드러날 때 차이와 분별이 일어난다.
분별은 가상으로 만든 것이고
마음이 꾸며 낸 것이다.

의식의 본성은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든 현상은 의식의 드러남이다.
개별적이기도 하고
집단적이기도 한
인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객관적 실체라고 믿는 것은 우리 인식의 대상이다.



다시 태어남의 순환은
몸과 말과 생각의 행로에 달려있다.
우리는 매 순간 가벼움과 해탈,
평화와 기쁨의 에너지를 전달해야 한다.
그래야 태어남과 죽음의 순환인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과 모두에게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



사물을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때,
사물 그 자체의 영역과 접할 수 있을 때,
우리 마음은 참된 마음이 된다.

참된 마음은 환히 빛나고 지혜롭다.
참된 마음 속에는 이해와 연민이 있다.

참된 마음의 눈으로 볼 때
연기는 놀라운 화엄의 세계를 가져온다.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가볍고 기쁘고 즐겁다.

연기는 이해심과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을 한곳에 모을 수 있고,
그러면 공동체의 각 구성원들이 누릴
작은 낙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햇빛과 기쁨과 평화로 가득찬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모이는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을 상상해 보라.

이해심이 많고 사랑이 넘치며
그릇된 인식에 지배되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마음속에 그려 보라.

이는 화엄의 멋진 세계이며,
망상에 빠진 마음이 아니라
지혜가 상호 의존해서 드러난 것이다.



원만히 성취된 본성은
사물을 상호 의존하는 존재라는
본질 속에서 인식한다는 뜻이고,
여럿 속에서 하나를 보고
하나 속에서 여럿을 보는 식으로 산다는 뜻이며,
태어남도 죽음도 없고 오고 감도 없음을 안다는 의미이다.

이런 방식으로 바라보는 법을 익히면
우리 앞에 놀라운 여여함의 세계가 드러날 것이고
해탈로 향하는 문이 열릴 것이다.

실체가 지닌
원만히 성취된 본성과 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지혜의 문을 열고
온갖 망상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여여함의 세계 속에 확고히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자아, 영원, 이원성과 같은
관념에 기반을 두고 사물을 바라보면
우리는 마음속 망상의 씨앗에 계속 물을 주게 되고
윤회의 순환 속에서 계속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꼭 필요하다.
이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의타기성, 즉 상호 의존적 본성이다.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고
실재의 상호 의존적 본성을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수행의 기본이다.



[수행의 길]

상호 의존하는 본성에 관해 명상하면
망상을 깨달음으로 변환할 수 있다.
윤회와 여여함은 둘이 아니다.
그 둘은 하나이다.

원만하게 성취된 자기 본성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며
개념화에 지배받지도 않는다.

사물 그 자체의 영역에는
태어남과 죽음, 하나와 여럿,
오고 감, 존재와 비존재가 없다.

사물 그 자체의 영역은 궁극적 차원이며
여여함의 영역, 열반의 영역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가상으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 수 있을까?

그 길은 상호 의존적 본성에 대해 
명상을 하는 것, 즉 의타기성을 수행하는 것이다.

윤회와 여여함은 똑같은 기반,
즉 우리의 마음, 우리 의식이라는 기반을 갖고 있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의
상호 의존적 자기 본성을 깊이 통찰하고
그것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무지를 깨달음을 통한 이해로 바꾸는 길이다.

우리는 무상과 무아와 연기를 깊이 통찰함으로써
사물의 존재 방식을 명확히 이해한다.

열반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은 
모든 존재의 상호 의존해서 존재하는 본성 혹은 연기로 설명하는 것이다.

상호 의존해 존재한다는 관점에서 만물을 볼 수 있을 때
내면에 있는 열반의 본성과 만나게 된다.



[꽃과 쓰레기]

꽃은 피고 있는 동안에도 이미 퇴비 속에 있고
퇴비는 이미 꽃 속에 있다.
꽃과 퇴비는 둘이 아니다.
번뇌와 깨달음도 상호 의존해서 존재한다.

우리 마음이 순수하고 차분하고 맑다면
우리는 이미 정토에 있는 셈이다.
어리석음과 깨달음은 상호 의존적이다.
열반은 오로지 태어남과 죽음의 세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모든 번뇌와 마음현상,
그리고 이 세상과 우리 몸과 
우리 마음속의 온갖 어려운 것들을 
변환시키려면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혐오하는 것들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그것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바꿀 수 있을 뿐이다.

괴로움과 망상을 포함해
지금 여기 있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괴로움과 망상을 받아들이면
이미 평화와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수행의 시작이다.

깨달음은 번뇌로부터 도망감으로써 얻을 수 없다.
번뇌의 본성을 심오하게 통찰할 때 깨달음과 접할 수 있다.

우리 아뢰야식 속에는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자각할 수 있는
알아차림이라는 놀라운 씨앗이 있다.
매 순간 알아차림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
탁자에, 의자에, 집에, 산에, 구름에,
우리 몸 각각의 세포 안에 열반이 있음을 안다.

알아차림 속에서 생활하면
깊이 통찰하는 집중 속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알아차림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것은
수행할 때 꼭 필요하다.

우리는 삶의 매 순간을 알아차림의 상태로 살아야 한다.

알아차리면서 보고 듣고 접촉해야 한다.
요리를 할 때도 자신의 동작을 알아차리면서 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호흡을 즐기면
삶을 깊이 접하게 해 주는
알아차림의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바른 견해]

깨달음의 씨앗에 물을 주기 위해
의식적인 호흡을 수행하라.
바른 견해는
제6 의식이라는 꽃밭에 피어나는 꽃이다.

명심할 것은 아뢰야식 속 씨앗에 물을 주는 정원사가
바로 제6 의식이라는 점이다.

정원사는 땅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물을 주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뢰야식이라는 땅속에 깨달음의 씨앗을 심고
거기에 알아차림으로 물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깨달음의 씨앗이
제6 의식 속에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 참된 삶이 가능하며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없다.

그것은 알아차리며 걷고, 알아차리며 호흡하고,
알아차리며 앉는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알아차림 수행은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법을 연습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행위만이 나의 진정한 소유물이다.
나는 내가 하는 행위의 결과를 피할 수 없다.
내가 하는 행동이 내가 딛고 서는 터전이 된다.



[근본적인 변환]

우리는 내면의 족쇄와 잠재된 성향을 인지함으로써
그것들을 변환시킬 수 있다.
우리의 습관 에너지가 사라질 때
근본적인 변환이 이루어진다.

알아차림에 뿌리를 박으면
우리 내면에서 무엇이 벌어지는지 명확히 볼 수 있다.

몸과 말과 생각으로 하는 행위들은
습관 에너지의 결과일 수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과 모든 행동이
우리의 상태를 결정한다.

행복과 빛의 세상으로 가고 싶으면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한다.
최상의 습관은 알아차림 수행이다.

습관 에너지만이 우리의 진정한 소유물이며
죽을 때도 계속 갖고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이다.

알아차림 속에서 살면
세계는 그저 우리의 개별적이고 집단적인 의식일 뿐,
나와 남, 태어남과 죽음, 오고 감, 존재와 비존재가
모두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근본적인 변환은 
아뢰야식 속 깊은 곳의 변환을 의미한다.
아뢰야식이 모든 의식의 바탕이며
궁극적으로 전체 우주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습관 에너지와 접하고
아뢰야식 속의 폭력과 절망,
두려움과 분노의 뿌리를 변환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근본적인 변환이 일어난다.
내면의 족쇄와 잠재된 성향을 변환시키려면
먼저 그것들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는 무아와 상호 의존적 존재라는 
통찰을 통해 바라보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아뢰야식 속 이해의 씨앗에 밤낮으로 물을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