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기적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기적

[틱낫한 지음 | 이창희 옮김 | 마음터 출판]



잠에서 깨며


눈을 뜨며 나는 미소를 짓는다
아직 쓰지 않은 스물두 시간이 내 앞에 있다
매 순간을 꽉 차게 살리라,
모든 존재를 자비심으로 바라보리라 다짐하노라



하루의 첫발자국을 디디며


땅 위를 걷는 일은
기적이다!
조심스레 내딛는 발자국마다
놀라운 법신이 드러난다



창문을 열며


창문을 열며
법신을 내다본다
삶은 얼마나 놀라운지!
매 순간 깨어 있으니
마음이 조용한 강처럼 맑아진다



                       



수돗물을 틀며


높은 산의 샘에서 물이 솟아난다
땅 속 깊은 곳에서도 물이 흐른다
기적처럼 물은 우리에게 다가와서
모든 생명을 살게 해주노라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숨을 들이쉬며 몸을 고요히 하고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짓는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순간임을 깨닫는다


오늘날처럼 바쁜 세상에서 가끔
의식적으로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큰 행운이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숨을 쉬면 몸이 고요해지고
정신이 집중되며 기쁨과 평화, 편안함이 찾아온다.
명상을 위해 앉아 있을 때,
아니면 하루 중 아무 때라도 의식적인 호흡을 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호흡하면서 이 게송을 읊으면 된다.

'숨을 들이쉬며 몸을 고요히 하고'

이 첫 행을 소리내어 읊는 것은 
마치 샘물 한 잔을 마시는 것과도 같다.
시원하고 신선한 느낌이 온몸에 퍼져가는 것이 느껴진다.
숨을 들이쉬며 이 게송을 읊으면
실제로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는 느낌이 든다.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짓는다.'

이렇게 읽음과 동시에 미소를 지으면
얼굴의 수많은 근육이 이완되며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 된다.
그래서 부처와 보살들이 항상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여기 앉아 있는 동안 나는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 앉아 있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

'최고의 순간임을 깨닫는다.'

편안하고 느긋하게 앉아서 우리의 호흡, 진정한 본질 등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기쁜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순간을 즐길 수 있다.
스스로 이렇게 물어보아도 된다.

'지금 당장 평화와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면 언제나 되어야
평화와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 내일? 아니면 모레?
무엇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못할까?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며 이렇게 말해도 된다.

'고요해지고 미소 짓는다,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순간이다.'

초심자든 경험 많은 수련자든 상관없이 모두 이 방법을 쓸 수 있다.
이 방법은 수련에서 아주 핵심적이기 때문에 
40~50년씩 수련한 사람들 가운데도 여전히 같은 방법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
입출식념경에서 부처님은 호흡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열여섯 가지 방법을 제시하셨다.
이 게송은 이 많은 방법들을 압축한 것이다.
역시 이 방법을 압축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숨을 들이쉬며 내가 들이쉬는 것을 안다
숨을 내쉬며 내가 내쉬는 것을 안다
들이쉬는 숨은 점점 깊어지고
내쉬는 숨은 점점 느려진다
숨을 들이쉬면 고요해지고
숨을 내쉬면 느긋해진다
들이쉬며 미소 짓고
내쉬며 내려놓는다
들이쉬며 지금 이 순간이
내쉬며 최고의 순간임을 깨닫는다

위의 글은 다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들이쉬고, 내쉬고.
깊게, 느리게.
고요하고, 느긋하게.
미소 짓고, 내려놓는다.
지금 이 순간, 최고의 순간.

이것을 실천하기는 아주 쉽다.
앉아 있을 때나 걸으면서, 아니면
서 있거나 어떤 활동을 하면서도 할 수 있다.

먼저 '들이쉬고, 내쉬고'를 연습한다.
들이쉬면서 마음속으로 '들이쉰다'고 말함으로써
숨 쉬고 있다는 인식을 일깨운다.
내쉴 때는 속으로 '내쉰다'고 말함으로써
숨이 나간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들이쉰다'와 '내쉰다'라는 말은 
지금 이 순간의 호흡으로 스스로를 데려오는 길잡이가 된다.
이렇게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다 보면
마음이 평화롭고도 분명하게 집중되는 것이 느껴진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과정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번 숨을 들이쉬면서 '깊이'라고 말하고
내쉬면서는 '천천히'라고 말한다.
의식적으로 호흡하면 호흡이 더 깊고 느려진다.
다른 특별한 노력은 필요 없다.
그저 나의 호흡이 더 깊고 느리며
더 평화롭고 안락하다는 사실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깊이, 느리게, 깊이, 느리게'를 반복하다 보면
그 다음 단계인 '고요하고, 느긋하게'로 넘어가고 싶어진다.

'고요'라는 단어는 경전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에서 왔다.

"나는 숨을 들이쉬고 있으며
온몸의 활동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만들고 있다.
나는 숨을 내쉬고 있으며
온몸의 활동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만들고 있다."

여기서 '몸'은 '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수련을 하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하나기 되기 때문이다.

숨을 내쉬면서 '느긋하게'라고 말한다.
느긋함이란 쫓기지 않는 느낌이며, 자유로운 느낌이다.
우리의 시간은 호흡과 호흡을 즐기는 것에만 바쳐져 있다.
가볍고 자유로우며 편안한 느낌이 든다.
지금 이 순간의 호흡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그래서 그저 호흡 수련을 즐길 뿐이다. 느긋함이라는 느낌은
불교에서 깨달음을 이루는 일곱 가지 요소 중 하나이다.

'고요하고, 느긋하게'의 단계를 지나면
'미소 짓고, 내려놓는다'로 넘어간다.
숨을 들이쉴 때 큰 기쁨이 느껴지지 않더라도 미소는 얼마든지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기쁨을 느끼지 않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호흡을 수련해왔기 때문에 이미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미소를 지으면 기쁨과 평화는 더욱 확고해지고 긴장이 사라진다.
이것은 마치 '입술 요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미소를 짓는다.

숨을 내쉬면서는 '내려놓는다'고 말한다.
이런 저런 계획이나 걱정을 내려놓고 그냥
나 자신이 되어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순간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음식을 내놓으며


이 음식 속에
뚜렷이 보인다
내 생명 떠받치는
온 우주의 존재가




이 게송을 읊으면 
우리의 삶과 살아 있는 모든 종의 삶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듯, 
모든 것이 상호의존하면서 함께 발생한다는 원칙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

먹는 일은 아주 심오한 수행이다. 
손수 밥을 지어 먹을 때든 누군가가 차려주는 밥을 먹을 때든 
음식을 바라보면서는 언제나 미소를 지어라.





붓다의 길[2]


붓다의 길 [The Buddha's Way]

- 틱낫한 스님(플럼빌리지 수련회 법회)






바른 견해라는 것은 지혜, Prajna, 깊은 이해입니다. 

그것은 수행과 명상의 열매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마음챙김과 
집중을 수행한다면 통찰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통찰, 그 깊은 이해, 그 지식, 그 지혜가 바로 정견(正見)입니다. 
우리는 정견(正見)이 모든 견해가 사라진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반야심경이 필요합니다. 반야심경은 우리에게 
정견(正見)이라는 것에 대한 바른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합니다.

플럼빌리지에서는 바른 생각이란 
자비, 이해와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만일 당신이 일으킨 생각에 자비와 이해가 없다면 그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이해, 바른 견해(正見)는 다른 모든 행위의 기초가 됩니다.

당신이 생각을 하든, 말을 하든, 행위를 하든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이 바른 것이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바른 견해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가 기초이며 전 세계적인 도덕 체계를 위해서 
불교 전통의 정수인 정견(正見), 바른 이해를 제시해야 합니다.

반야심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태어남도 죽음도 없고, 생성도 파괴도 없고, 증가도 감소도 없다.’ 
그리고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다.’로 계속 이어집니다. 
고통도 행복도 없고, 이로움도 해로움도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공부하면 선/악은 우리 마음의 반영이며 
객관적인 실체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잘 알려진 존재/비존재의 쌍과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존재와 비존재를 초월합니다. 
존재와 비존재는 우리 마음 속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의식은 내면에 있고 세상과 현실은 
바깥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공성에 대한 가르침, 연기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진정 바른 이해, 정견(正見)에 도달하기 위해 그와 같은 가르침을 접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견(正見)을 갖게 되면 모든 것이 진정으로 바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곧 지구입니다.
우리 자신을 잘 보살피는 것은 지구를 보살피는 것입니다.

수행자로서 우리가 세상과 부처님께 바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통찰입니다.

통찰은 우리를 해탈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그 통찰은 마음챙김과 집중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챙김과 
깊은 집중 속에서 사는 것은 
지속적으로 통찰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해탈, 
우리 자신의 치유, 우리 자신의 자양을 위한 것이며 
세상의 해탈, 세상의 치유, 세상의 자양을 위한 것입니다.





바른 이해란 정견(正見), 
Samyag-drsti는 모든 견해를 초월합니다. 

모든 견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도구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무상(無常), 무아(無我), 연기(緣起)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견해, 정견(正見)이란 
무상, 무아, 연기를 포함한 모든 견해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야심경의 핵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이 손가락과 같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의도는 당신의 손가락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달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을 달이라고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길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손가락을 아주 지혜롭게 써야 합니다. 

불법을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방편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우리는 통찰과 견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르침은 견해로서 제시된 것입니다.

(성냥에 불을 붙이며) 
이것은 당신에게 성냥을 주려고 있는 것이 아니고 
불꽃을 주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 성냥개비를 적절히 잘 써서 성냥이 불꽃을 일으키게 해야 합니다. 
불꽃이 나타나면 이 성냥개비는 끝에 달린 성냥을 태웁니다. 

통찰이 일어나면 그것은 견해를 소멸하고 더 이상 어떤 견해도 남지 않습니다. 
이제 당신은 자유롭습니다. 거기에는 통찰만 있고 견해는 사라졌습니다. 
당신을 해탈하게 하는 것은 통찰이지 견해가 아닙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생각은 세상에 영향을 미칩니다. 
생각을 잘못 하면 세상이 파괴되고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도 고통을 겪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생각(正思惟)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바른 생각을 일으키면 그 생각에는 분별이 없습니다. 

분별하지 않고, 연기, 이해, 용서, 자비와 궤를 같이하는 생각은 
당신 자신, 당신의 건강, 당신의 마음, 그리고 세상에 즉각 영향을 미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바른 생각을 하는 것은 당신의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바른 생각은 당신을 치유하고 세상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좋은 수행자는 매 순간 바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바른 견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바른 생각을 하는 것은 매우 쉽고 자연스럽습니다.

바른 견해에는 분별이 없습니다. 
바른 견해는 불이와 연기, 분별하지 않음의 통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른 생각의 예술을 배워야 합니다. 

말도 역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비, 이해, 분별하지 않음, 
포용과 궤를 같이하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몸과 마음에 경이로운 것입니다. 
그와 같은 바른 말에는 치유의 효과가 있습니다. 
친절, 용서, 자비가 깃든 말을 하고 나면 훨씬 기분이 좋아집니다. 

바른 말은 당신을 치유할 수 있고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치유하고 당신을 자유롭게 하고 다른 사람과 세상의 치유를 돕습니다. 
그것이 두 번째 종류의 행위입니다.

세 번째 종류의 행위는 몸으로 하는 행위입니다. 
당신이 구하고, 뒷받침하고, 보호하고, 편안하게 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면 
당신 마음은 아주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효과를 즉각 맛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 가지 종류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신(身), 구(口), 의(意)로 짓는 행위이며 
그와 같은 행위를 업(業) 즉, 카르마(karma)라고 합니다.

업의 원인이 있으면 업의 열매, 즉 업의 과보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를 할 때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위의 업을 짓습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에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생각의 영향, 말의 영향, 행위의 영향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살아 있든 사라졌든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의 행위는 계속 남아 있을 것입니다. 

업은 계속됩니다. 
에너지로서의 업, 원인과 결과로서의 업은 계속됩니다. 

당신이 어떤 생각을 일으킬 때 
당신이 일으킨 그 생각에는 당신의 서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 생각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이지요. 
당신은 그 생각에 책임이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자비, 용서, 분별하지 않음의 생각이라면 당신은 아름답게 계속될 것입니다.

바른 생각은 두려움이나 분별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연기의 통찰, 무아의 통찰, 불이의 통찰이 있으면 
생각과 말과 행위가 바를 수 있습니다. 
모든 생각, 모든 말, 모든 행위에는 
우리의 서명이 남아 있고 우리의 업과 함께 계속될 것입니다.






(한글 번역 자료 출처 : BTN(권선아 번역) 바로가기▷)







붓다의 길[1]


붓다의 길 [The Buddha's Way]

- 틱낫한 스님(플럼빌리지 수련회 법회)  



마음챙김과 집중의 에너지는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도록 돕습니다.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접촉할 때
당신은 삶의 온갖 경이로움에 접촉합니다.
당신은 불국정토와 신의 왕국이 지금 여기에 열려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불교수행자를 위해서라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정토를 찾고 있다면 지금 여기에서 그것을 찾으십시오.
지금이 아니라면 정토는 결코 없습니다.
기독교인 친구들을 위해서라면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의 왕국을 찾고 있다면 지금 여기에서 그것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신의 왕국은 지금이 아니라면 결코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는
신의 왕국과 불국정토를 포함한 모든 경이로움에 다가가는 문입니다.
부처님, 예수님, 자유, 행복 역시 현재의 순간에서 찾아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수행은 당신이 지금 이 순간이라는 집으로 돌아가도록 돕습니다.

부처님의 길은 에너지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마음챙김의 에너지는
수행 중에 이끌어내야하는 에너지입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수행입니다.





마음챙김은
우리가 거기 있도록 지금 이 순간에 서 있도록 돕는 에너지입니다.
마음챙김은 마음을 몸으로 되돌려놓습니다.

마음챙김은
우리가 진정으로 지금 이 순간에 머물도록,
진정으로 살아있도록, 삶의 경이로움과 접촉하도록 돕습니다.
그 경이로움은 지금 이 순간에 열려 있습니다.

마음챙김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도록 도와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복, 우리의 고통을 알게 해 줍니다.
왜냐하면 마음챙김은 우리의 행복과 고통, 세상의 고통을 
다루도록 도와주고 세상의 행복을 위해 일하도록 도와줍니다.





마음챙김의 에너지는 집중의 에너지를 수반합니다.
당신이 무엇에 전념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무엇에 대한 마음챙김을 지켜 살아있게 한다면
당신은 거기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거기에 집중하면 할수록
당신은 그것에 더욱 마음챙김하게 됩니다.
그 두 가지는 서로를 돕는 에너지입니다.

마음챙김과 집중이 충분히 강하면 통찰을 얻게 됩니다.

통찰은 깨달음이며 이해입니다.

우리는 통찰이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년 간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통찰은 일상사입니다.
마음챙김이 있을 때면 언제나 거기 어떤 통찰이 있습니다.

당신이 숨을 들이쉰다고 가정합시다.
당신이 마음챙김 안에서 숨을 쉰다면
마음챙김하면서 숨 쉬는 것은 이미 통찰입니다.
모두가 숨을 들이쉬지만 모두가 숨을 들이쉬는 것에 깨어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에 깨어있습니다. 그것이 이미 통찰입니다.
그것이 이미 깨달음이고 그것이 이미 해탈입니다.

마음챙김과 함께 숨을 들이쉬면
당신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깨닫습니다.
당신이 살아 있지 않다면 당신은 숨을 들이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챙김과 함께 숨을 들이쉬면
당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통찰을 얻게 됩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언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적입니다. 모든 기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위대한 기적입니다. 당신은 다시금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당신은 들이쉬는 숨이 축제가 되는 그런 방식으로 숨을 쉴 수 있습니다.
당신은 들이쉬는 숨으로 당신이 살아 있음을 축하합니다.





마음챙김과 함께
숨을 쉬는 것은 아주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챙김을 가져오고
집중을 가져오고 통찰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통찰이 있으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압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지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하면서 이끌어내는 세 가지 에너지는 모든 윤리의 기초가 됩니다.

마음챙김 - 집중 - 통찰을 말하지 않고서는
도덕을 말할 수 없고 바른 행동을 말할 수 없고 불교적 윤리를 말할 수 없습니다.
마음챙김- 집중 - 통찰의 에너지와 함께
당신은 길을 닦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인류를 위해 길을 찾고 길을 닦고 길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은 평화에 이르는 길, 행복에 이르는 길, 변화와 치유의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의 측면에서 전 세계적인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기본적인 수행은
마음챙김 - 집중 - 통찰의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통찰은 자비, 사랑, 조화, 평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한글 번역 자료 출처 : BTN(권선아 번역) 바로가기▷)







우리가 머무는 세상


우리가 머무는 세상
                        평화와 환경을 향한 불교적인 다가섬

                                                                        [틱낫한 지음 | 안희경 옮김 | 판미동 출판]



[자료 출처 : 구글어스]


우리 모두는 이 지구별을 포근하게 안고 살피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을 위하여.

그들도 우리처럼 이 별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는 반드시 그 먼 시간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

지금 그대가 꾸려 가는 이 삶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메세지가 되어야 한다.


-틱낫한-


[자료 출처 : 구글어스]



서문


틱낫한의 새 책『우리가 머무는 세상』에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주목할 만한 예가 나온다.
결코 아니라고 우길 수 없는 인연의 고리를  섬뜩하게 보여 준다.
이는 붓다의 경전을 옮긴 것으로 '아들의 살점에 담긴 가르침'이라 불린다.
가르침의 요지는 이렇다.

'우리가 자비로운 마음을 깨워 소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이들의 살점을 탐욕스럽게 뜯어 먹고 있는 것과 같다.'

나는 불교 신자도 아니고 현자도 아니다.
고작 저널리스트일 뿐이다.
틱낫한의 새로운 목소리를 소개하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하다.
틱낫한은 사소한 행동을 할 때에도 마음을 깨워 함께하자고 한다.
그 길 위로 친절하게 안내한다.
오늘날과 같이 긴박한 요구가 쏟아지는 시대에
그가 다시 우리 앞에 나서 주었다.
너무나도 기쁘다.

그의 덕망 있는 목소리가 우리를 또 다시 일으키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인간이 최근에 저질러 놓은 손실보다
더 큰 손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자연 자체의 작용으로 인한 손실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푸르게 살아 있다.
수백만 년 동안 조용히 있던 화산도 주기적으로 폭발했다.
대재앙을 부르는 소행성의 충돌도 주기적으로 일어나
이 지구라는 행성을 무참히 파괴했다.
거의 모든 생명이 사라졌다. 아예 멸종되었다.
그런데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이어져 왔다.
삶이란 우리의 입이 놀라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질기다.
이 별의 생명들은 기대하지 못했던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다시 태어났다.
더불어 그 생명의 터전들도 비옥해져 왔다.
한 시대는 거대한 파충류들이 이 지구를 채웠다.
또 다른 시대는 엄청나게 큰 포유류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 신비롭고도 놀라운 생명력은 이전에도 순환되어 왔고,
앞으로도 다시 주역이 바뀌어 가며 이어질 것이다.

그 누구도 영원히 살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개체도 점진적인 멸종을 피할 수 없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것은 축복이며
생명을 연장시켜 나가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다.
틱낫한도 이와 똑같이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우리는 변화하며 살아가는 거대한 가장행렬의 일부분이다.
이 행렬은 아무리 깊은 상처를 입더라도 항상 거듭난다.
이런 진실을 깨달으면 우리도 평화로워질 수 있다.


환경은 모든 나라와 모든 신념 속에 있는 인간들을 통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통합을 이루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 모두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 함께 나선다면 함께 살아남을 것이다.
서로 다른 모습의 인간들, 서로 다른 생명체들,
그리고 서로 다른 세상 만물을 환경이라는 끈으로 묶어세운다면 말이다.

그러써 우리는 평화를 완성하는 것이다.


                                                                                              - 앨런 와이즈먼

               (「인간 없는 세상」의 저자, 애리조나 대학 국제 저널리즘 교수이자 저널리스트)





틱낫한 스님의 "아! 붓다"


삼보(三寶)

이번 생에 가야할 길을 보여주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이해와 사랑의 길인
다르마에 귀의합니다!

화합과 깨달음 속에 살아가는 공동체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부처님, 법 그리고 승가에 귀의하는 것은 
불교에서 근본적인 수행의 자리를 차지한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시고
미소를 지은 채 평화롭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앉아 계시며
이해와 자비의 살아 있는 원천이신
부처님은 길을 보여주신 스승님!

무지에서 벗어나
깨어있는 삶으로
다시 인도해주는
다르마는 청정한 길!

기쁨을 누리고
해탈을 이루며
삶에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승가는 아름다운 공동체!



삼해탈문(三解脫門)

3법인은 공(空, shunyata), 표시 없음(無相, animita) 그리고
목적 없음(無願, apranihita)의 3해탈문에 들어가는 데 쓰는 열쇠다.
모든 불교 종파는 3해탈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다.
3해탈문은 세 가지 집중, 즉 삼삼매(三三昧)라고도 부른다.
이 세 가지 문을 통해서 들어가면 삼매 속에 머물며
두려움, 혼란 그리고 슬픔을 여의게 된다.



사성제와 팔정도









12 연기

12연기(緣起, 
pratitya samutpada
글자 그대로 하자면 '사물들은 의존을 통해 생겨난다'는 뜻)는 
심오하고 훌륭한 가르침이자 모든 불교학과 수행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를 원인과 결과의 가르침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기도 한데, 
그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개 원인과 결과를 별도의 실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원인은 늘 결과에 앞서고 하나의 원인은 하나의 결과를 산출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기의 가르침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는 동시에 일어나고(生起, samutpada) 
모든 것은 다양한 원인과 조건의 결과물이다.

부처님은 연기를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고 계신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 
이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

부처님이 연기를 가르치시는 것을 듣고 난 다음 아난다는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연기의 가르침은 심오하고 미묘해 보이기는 하지만, 
매우 간단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거라. 
연기의 가르침은 실로 심오하고 미묘한 것이다. 
연기의 본질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곧 부처님을 볼 수 있는 법이다."

무상의 가르침은 연기의 가르침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다양한 원인과 조건이 받혀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존재와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조건은 우리가 아닌 것에서 나온다. 
무상과 무아를 알게 되면 연기를 알게 되는 것이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연기에 입각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의 지침 또는 조언이 아니라 
사물의 발생 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보려는 경향 때문에 
열두 가지 고리는 여러모로 오해되어 왔다. 그중 하나는 
그것을 생과 사가 있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이 대개 노사로 12연기를 시작하고 있는 까닭은 
고통을 알고 그 뿌리를 찾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사성제의 가르침과 수행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12연기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우리는 심신의 부정적인 상태의 연기만이 아니라 
긍정적인 상태의 연기를 설명하는 데 적합한 말도 찾아볼 필요가 있다. 
부처님은 무명이 사라지면, 밝은 깨달음이 나타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12연기를 공부하는 것은 
무명의 요소를 줄이고 밝음의 요소를 늘리기 위해서이다. 
무명이 줄어들면, 갈망, 증오, 자만, 의심 
그리고 갖가지 견해 역시 줄어들게 되고 
사랑, 연민, 기쁨 그리고 평정심이 늘어나게 된다. 
이것은 12가지 고리 모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11세기 베트남의 한 승려가 어느 선사에게 물었다. 
"생사를 초월하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생사의 한 가운데다." 
열반을 구하기 위해 생사를 포기한다면, 열반을 구하지 못하게 된다. 
열반은 생사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반은 생사 그 자체다. 
그것은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는 문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생사가 되고, 저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열반이 되는 것이다.

이제 12연기의 가르침을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때가 되었다. 
12연기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것의 긍정적인 측면도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전념의 씨앗




[자료 출처 : "틱낫한 스님의 아! 붓다"  틱낫한 지음 | 진현종 옮김 | 반디미디어 출판]





팔정도


팔 정 도